A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0한사2-02-01 · 3문항
문제 110한사2-02-01객관식
다음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서의 한국 관련 조항입니다. 이 결정의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 조선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 ⋯ 조선임시정부 및 조선민주주의단체의 참여하에 ⋯ 최고 5년 기간의 4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서」, 1945년 12월 28일
결정서는 조선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를 먼저 못박고, 그 조선임시정부 및 조선민주주의단체의 참여하에 최고 5년의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한다는 순서를 밝혔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이 핵심이고 신탁통치는 그 뒤의 보조 장치였던 것이지요. 분할 통치는 이 결정에 들어 있지 않고, 남한만의 총선거는 1948년 2월 UN 소총회가 내린 결정이며, 기간도 '최소 5년'이 아니라 '최고 5년'이므로 나머지 선지는 맞지 않습니다.
문제 210한사2-02-01객관식
다음 원칙이 좌·우 양쪽 모두에게 비판받은 까닭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 3. 토지 개혁은 몰수·유조건 몰수·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 4.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
— 「좌우합작 7원칙」, 1946년 10월 7일
본문은 좌익(박헌영)은 "토지의 무상 몰수가 아니다"라며, 우익(한민당)은 "토지를 빼앗는 사회주의"라며 반대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같은 3항을 두고 한쪽은 너무 약하다고, 다른 쪽은 너무 과격하다고 본 것이지요. 7원칙은 좌우 합작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1항)과 미소공위 속개(2항)를 서로 다른 항으로 나누어 담고 있고, 친일파 처리·입법 기구 설치도 좌·우가 함께 반대한 지점은 아니었으므로 나머지 선지는 근거가 없습니다.
문제 310한사2-02-01분류
남한의 농지개혁과 북한의 토지개혁을 견주어, 다음 특징을 알맞은 칸에 넣어 보세요.
항목을 누른 뒤 넣을 칸을 누르면 들어가요. 칸에 든 것을 누르고 위 ‘보기’ 칸을 누르면 다시 꺼낼 수 있어요.
북한 토지개혁(1946)
남한 농지개혁(1949~50)
본문의 비교표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북한은 무상몰수·무상분배로 지주에게 보상 없이 토지를 거두어 한 달 만에 마쳤고, 남한은 유상매수·유상분배로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주고 농민은 5년간 평년 수확량의 1.5배(연 30%)를 지가로 갚는 방식이라 4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남한 쪽이 훨씬 보수적이었지만, 소작지 비율이 광복 직후 약 65%에서 1951년 8%로 떨어져 지주제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B
6·25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 · 10한사2-02-02 · 3문항
문제 410한사2-02-02객관식
국군과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된(1·4 후퇴) 직접적 계기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은 1950년 10월 19일 밤, 중국 인민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이 압록강을 건너 들어왔고 11월 말부터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고 적습니다. 그 결과 12월 흥남 철수와 1951년 1월 4일 서울 재함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반공포로 석방은 1953년 6월의 일이고, 소련은 안보리를 보이콧 중이어서 거부권을 쓰지 못했으며, 애치슨 라인 발표는 개전 전인 1950년 1월이라 후퇴의 계기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 510한사2-02-02객관식
6·25 전쟁의 성격을 '국제화된 내전'으로 보는 복합론의 시각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복합론은 한반도 좌·우 대립이라는 내적 배경 위에 미·소·중의 개입이라는 외적 요인이 결합되어 발발했다고 봅니다. ①은 미·소 냉전의 대리전으로 보는 국제전론의 규정이고, ②는 좌·우 대립을 본질로 보는 내전론의 규정이어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국제화된 내전'이라는 규정이 되지 못합니다. ③은 본문이 단순한 '북한의 남침'으로 환원해서도, '미국의 음모'로 환원해서도 6·25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못박은 지점이라 어긋납니다.
문제 610한사2-02-02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정전협정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은 38선과 정확히 일치했고, 대한민국은 개성과 옹진반도를 그대로 지켰다.
틀립니다. 본문은 군사분계선이 38선과 비슷한 위치이지만, 동부에서는 38선보다 북쪽으로, 서부에서는 38선보다 남쪽으로 그어져 한국이 약 1,500km²의 땅을 얻은 대신 옹진반도와 개성을 잃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휴전 회담에서도 북한·중국의 '38선 복귀' 주장 대신 UN군이 내세운 현 접촉선 기준이 1951년 11월에 채택되었으므로, 임시 경계선이던 38선이 정전 당시의 접촉선을 따라 그어진 휴전선으로 바뀐 것입니다.
C
민주화를 위한 노력 · 10한사2-02-03 · 3문항
문제 710한사2-02-03객관식
유신헌법(7차 개헌, 1972)의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의 비교표대로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임기 6년, 중임 제한 없음)으로 뽑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유신정우회)하며, 긴급조치권으로 헌법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국정감사권은 되살린 것이 아니라 폐지되었고, 7년 단임·간선제는 1980년 5공화국 헌법(8차 개헌)의 내용이며 그때에도 직선제는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문제 810한사2-02-03객관식
1987년 4·13 호헌조치가 오히려 6월 민주항쟁을 불러온 까닭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4·13 호헌조치는 현행 헌법(5공화국 헌법)을 유지하고, 13대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따라 간선으로 선출하겠다는 발표였습니다. 본문은 이를 사실상 전두환 → 노태우로의 군정 연장이라고 적었고, 2월 부검으로 박종철의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 "고문 정권 타도하라"는 분노가 들끓던 상황에서 나온 발표였던 만큼 시민의 분노에 불을 붙였습니다. ①과 ④는 두 달 뒤 나온 6·29 선언의 내용이고, ②는 1972년 10월 유신 때의 조치입니다.
문제 910한사2-02-03객관식
다음 호소문에서 읽어 낼 수 있는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처음에 우리는 너무도 경악스러운 사실 앞에 할 말을 잊었다. ⋯ 시민 여러분! 우리는 잠시 동안의 평화를 위하여 또다시 폭압의 굴레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정녕 살고 싶었기에,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에, 양심을 지키고 싶었기에 총을 들었습니다."
— 「광주 시민군의 호소문」, 1980.5.25
호소문은 총을 든 이유를 정녕 살고 싶었기에,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에, 양심을 지키고 싶었기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권력 장악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뜻이지요. 본문에 따르면 시민들이 무기고를 턴 것은 5월 21일 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 뒤의 일이고, 5월 18일 시위 자체가 비상계엄 확대에 항의해 시작된 것이므로 나머지 선지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D
산업화의 성과와 사회·환경 문제 · 10한사2-02-04 · 2문항
문제 1010한사2-02-04객관식
다음 두 사건이 함께 보여 주는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 — 두산전자가 페놀 30톤을 무단 방류해 대구·부산 시민의 식수원이 오염되었다.
· 1985년 울산 온산공단의 '온산병' — 1981년부터 약 1,000명의 주민이 신경통·관절통·피부질환을 호소했고, 정부는 인과관계를 부인했으나 1985년부터 주민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
본문은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환경 의식을 일깨우는 결정적 계기로, 온산병은 정부가 인과관계를 부인하다 1985년부터 주민 집단 이주가 이루어진 사례로 적습니다. 공장에서 나온 오염이 곧바로 주민의 식수와 몸으로 되돌아온 일이니, 본문이 말한 압축 성장은 정치적 권위주의, 노동의 희생, 환경의 파괴, 빈부 격차라는 그늘과 동전의 양면이라는 지적이 그대로 확인됩니다. 3저 호황(1985년 이후)은 수출 호조에 관한 내용이고, 농산물 수입 개방은 도농 격차를 다룬 대목이며, 온산병에서 정부는 규제를 앞서 마련한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를 부인했으므로 나머지 선지는 맞지 않습니다.
문제 1110한사2-02-04객관식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1970년대 노동 운동의 전개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은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의 분기점이 되었고, 1970년대에 동일방직·YH무역·원풍모방 등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줄을 이었다고 적습니다. 동일방직 사건(1978)과 YH 사건(1979)은 부마 항쟁과 10·26 사태의 한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선지도 모두 본문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시기가 1970년대가 아닙니다 — ③의 쟁의 약 3,300건·노조 1,200여 개는 6월 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②의 민주노총 결성은 1995년, ④의 총파업은 1996년 말~1997년 초의 일입니다.
E
문화 변동과 일상생활 · 10한사2-02-05 · 2문항
문제 1210한사2-02-05객관식
광복 이후 한국인의 주거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본문은 1971년 첫 강남 아파트(반포 주공)가 들어서고 1970년대 후반 압구정·잠실 단지가 형성되며 아파트는 중산층의 새 주거 양식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1기 신도시(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는 아파트를 크게 늘린 200만 호 공급 정책이었고, 1960~70년대 도시 중산층의 꿈은 한옥이 아니라 입식 부엌·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양옥'이었으며, 2020년 기준 한국 가구의 약 60%가 아파트에 삽니다.
문제 1310한사2-02-05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발표되던 해에는 금지되지 않았고, 유신 체제가 들어선 뒤에 금지곡이 되었다.
옳습니다. 본문은 이 노래가 1971년 발표되어 양희은이 노래했다고 적고, 금지 시점은 1975년 유신 정부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고 따로 밝힙니다. 유신 체제는 1972년 유신헌법으로 시작되었으니, 발표(1971)와 금지(1975) 사이에는 몇 해의 간격이 있었던 셈이지요. 본문은 가사에 정치적 직접성은 없지만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거친 광야' 같은 구절이 시대를 비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금지된 뒤 오히려 대학가에서 가장 자주 불린 것을 금지가 곧 가장 강력한 광고가 되는 역설이라고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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